socially retarded

"리흐테르 - 회고담과 음악 수첩" ★★★★

리흐테르 - 회고담과 음악 수첩- 8점
브뤼노 몽생종 지음, 이세욱 옮김/정원출판사

브뤼노 몽생종은 유럽의 영화 제작자입니다. 20세기 주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몇 편 만들었지요. 저는 이 책으로 처음 만났습니다만.; 이 책은 본디 다큐멘터리 영화가 될 것이었으나, 여기엔 또 하나의 O.헨리적 이야기가 있습니다. 책의 앞 부분 내용 축약이 되는지라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분께는 책이 재미없어질 것 같아 가립니다.
예후디 메뉴인, 오이스트라흐 등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온 몽생종은 리흐테르의 다큐멘터리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몽생종은 계속 리흐테르에게 접촉을 시도했고, 말년에서야 리흐테르의 마음이 바뀌어 긍정적인 연락을 받았습니다. 리흐테르가 몽생종의 작업물을 본 거죠. 촬영을 좋아하지 않는 리흐테르에게서 간신히 녹음만을 허가받고, 작업을 진행하다가 몰래 카메라를 숨겨 촬영했지만 리흐테르는 금방 카메라를 인식하고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몽생종에게 넌지시 알리면서도 별 제제를 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바로 카메라를 꺼낸 건 아니지만, 촬영은 순조로이 진행되었고, 둘은 리흐테르가 연주 여행을 다녀온 후에 작업을 마무리짓기로 합니다. 그리고 그 연락이 오고 1주일 후, 리흐테르는 죽었습니다.
[닫기]

이 이야기를 책의 앞에 배치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이런 류의 이야기에 못내 끌리는 저는 헉, 하고 육성으로 뱉은 뒤에 자세와 책을 고쳐잡았습니다. 몽생종은 영화로 만드는 것은 포기하지만, 자료를 묻을 수 없어 책으로 내기로 합니다. 녹음이 인터뷰라기보다 리흐테르의 자발적 잡담에 가까웠기 때문에, 리흐테르를 화자로 삼습니다.
시간적 순서에 따른 구성은 아닙니다. 주자의 어릴 적, 혹은 부모님과 조상에 대한 추적부터 시작해서 성장 과정을 묘사, 음악적으로 변화한 계기, 그리고 그의 음악 세계를 화려하게 묘사... 이런 건 없습니다. 말했듯이 이건 리흐테르 본인이 한 이야기이기 때문이지요. 그는 당연하게 계속해서 피아노를 쳐 왔고, 남의 눈으로 보았을 때 큰 전환점도 80세가 넘어서 회상하는 본인에게는 이 때는 이런 일이 있었지, 일 뿐입니다. 이 어조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읽기가 편해요.
앞 부분을 조금 읽다가 역자를 확인하니 이세욱입디다. 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세욱이오. 베르베르 전문 역자인 줄로만 알았더니... 이런 책도 하는군요. 베르베르가 한국에서 성공했던 데는 그의 현학적인 문체가 이세욱을 통해 옮겨왔던 것도 한 몫 하지요. 베르베르의 문체랑만 잘 어울리는 줄 알았더니 리흐테르, 혹은 몽생종과도 궁합이 좋습니다. 이 책은 이세욱에게 큰 덕을 입고 있습니다. 리흐테르의 꾸밈 없고 덤덤한 성격이 잘 드러납니다.

리흐테르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대다수의 일에 별 의사를 표하지 않고 따라왔습니다만, 몇몇 일에서는 언성을 높입니다. 미국에 다녀와야 했던 것과 러시아가 자신에게 가했던 압박 중 어떤 것 등이지요. 아주 심한 원칙주의자이지만, 그 원칙이란 게 몇 개 없어 세상과 많이 부딪히지 않고 살아온 사람으로 보입니다. 전체적으로 리흐테르는 순하고 완고한 할아버지의 이미지입니다. 두 단어가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여기서 만나는 리흐테르는 묘하게 어우러집니다.
리흐테르의 음악을 말로 거르라면 견고함, 깨끗함이란 단어가 떠오릅니다. 이 책은 리흐테르의 그러한 이미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약간 투박하기도 하지만, 정직하며 정확합니다. 평생 이렇다할 스캔들 하나도 없었던 그에게는 음악의 수도승이라는 별명이 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어울리게도, 리흐테르는 음악에 관한 이야기밖에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전 이 사람이 여자도 꽤 좋아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음악이 너무너무 좋아서, 거기에 시간을 투자하다 보니 스캔들을 일으킬 기력도 없던 거라고요.) 리흐테르와 아주 잘 어울리는 뮤지션 중 하나인 카라얀과는 상당히 대조적이지요.

프로코피예프 사망 당시, 리흐테르는 러시아의 한 신문에 자신이 쓴 글을 게재했습니다. 그 책 역시 이 책에 실려 있습니다. 앞과 같은 어조에, 꽤 길고 재미난 글입니다. 저는 이 책에서 이 부분을 가장 좋아합니다. 여기서도 역시 리흐테르는 사람이 어떻다, 가 아니라 나는 이 사람과 이런이런 음악을 같이 했었다, 라고 밖에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그냥 음악 안에서 살았어요.

책이 상당히 두꺼운데, 반절 정도는 음악 수첩입니다. 이는 리흐테르가 다큐멘터리 작업에 도움이 되라고 녹음 당시 몽생종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리흐테르가 평생 동안 들어온 음악에 대해 짤막하게 코멘트가 되어 있지요. 너무 방대하고, 또 개인적이라 저는 조금 읽다가 덮고, 뒤의 인덱스에서 이름 몇 개만 찾아 보고, 그랬습니다. 몽생종이 편집할 때 너무 신랄한 것은 뺐다는데 그래도 너무 신랄합니다. 이 음악 수첩에 의하면 리흐테르는 마르타 아르헤리치를 아주 싫어했습니다. 특히 기돈 크레머와 연주할 때, 한 번도 맞춰 보지 않고 무대에 올라간다면서요. 그 외에 함께 잠깐 연주를 맞추어 본 글렌 굴드와 자클린느 뒤 프레에 대해 본문에서 좋게 언급한 것이 있습니다. 리흐테르가 글렌 굴드를 좋아한 것은 조금 의외였는데요, 둘이 너무나 다르지 않습니까. 가장 스타카토적인 연주를 하는 주자와 가장 정석적인 연주를 하는 주자. 극은 극에 끌린다는 오래된 말도 떠오르고, 그럴 만 할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렇습니다. 리흐테르는 굴드의 연주 뿐만 아니라 사람 자체를 꽤 마음에 들어한 것 같아요. 그가 치떨리게 싫어하는 미국에서 주로 연주한 사람이니 더이상 작업을 같이 할 기회는 없었겠지만. 리흐테르가 굴드를 만났을 때 더 젊었더라면 그와 작업을 더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리흐테르는 아주 대범한 방식으로 세상을 거부하는 굴드를 조금 동경한 것 아닐까요. 자클린느 뒤 프레는 로스트로포비치에게서 배운 적이 있지요. 리흐테르가 자클린느를 만난 것도 이 때입니다. 당연히 좋아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리흐테르는 로스트로포비치도 상당히 좋아했어요. 연주만. 좋은 합주를 여럿 남겼지만 로스트로포비치의 출세, 명예 지향적인 성격에 힘들어했습니다. 이는 위에서 말했던 카라얀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셋이 연주를 함께한 적이 있었는데 리흐테르는 두 명의 적과 싸우느라 버거웠다고 해요. 그가 가장 마음에 들어한 피아니스트는 졸탄 코지슈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사람의 음반을 구입할 방법을 한 가지도 찾지 못했습니다...=_= 그 외엔 아르투어 루빈스타인, 아르투어 슈나벨, 에밀 길렐스의 연주를 좋게 언급했습니다. 넹 좋다고 말한 건 수도 없이 많는데 이들은 그 중에 저도 좋아하고 기억하는 이름일 뿐이예요.

잘 만든 책입니다. 번역도 좋고, 내용도 재미나게 구성되어 있고, 종이 질도 좋고. 이세욱은 이 기세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번역해주면 좋을 텐데요... 국일판은 국내 독자들에게 너무 가혹합니다. 브뤼노 몽생종의 태도도 좋습니다. 스비야토슬라프 리흐테르는 독일계 러시아인이라 이름이 이런데, 몽생종은 러시아판 서문에 이 책을 완성하는 데 필수적인 러시아판이 나와서 몹시 기쁘다고 말합니다. 한국판은 프랑스어판을 기본으로 삼고, 러시아판에만 있는 내용을 덧붙였습니다. 은근히 유머도 있어서, 이 책을 읽다 한밤중에 깔깔 웃은 적도 몇 번 있어요. 자기 전에 잠깐 읽으려 했다가 단숨에 다 읽어버렸습니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권하고 싶군요. 클래식을 좋아하건 아니건, 피아노를 특출나게 좋아하건 아니건(피아노에 대해 애정이 대단한 피아니스트의 자서전인데, 싫어하는 사람은 읽으면 안 되겠죠), 리흐테르라는 이름을 한 번이라도 들어 본 사람이라면 무조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겁니다.

+

+
리흐테르는 "리흐테르? 라흐마니노프한테나 어울리는 연주자죠."라는 평도 들어 보았다고 합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아주 좋아하는 노래인데, 꽤 좋은 평을 받고 있음에도 저는 이 곡의 리흐테르 버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 이 곡은 클라이번의 연주가 저의 엄마 오리이고 생필품이기 때문에 이것 하나 외에는 다른 걸 거의 받아들일 수조차 없지만요... 리흐테르의 연주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로스트로포비치와 함께 연주한 베토벤 몇 곡입니다. 피아노 혼자나 피아노 교향곡이 아니라요. 피아노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악기이고, 첼로는 그 다음으로 좋아하는 악기입니다. 한참 피아노를 듣다가 첼로도 듣고 싶어진다, 할 때 저는 이 연주를 듣습니다. 그리고 이걸로 충분한다는 느낌입니다.

+
지그님, 이 글이었어요.

+
구글링으로 얻은 리흐테르 사진을 몇 장 올립니다. 얼굴만 봤을 때는 에잉 그냥 커다란 할아버지네, 싶겠지만 책을 읽고 얼굴을 보니 참으로 귀여워 보입니다. 저 얼굴 저 덩치로 피아노 앞에 꼿꼿이 앉아 있었단 말이죠, 그것 참.



이 두 가지는 제가 본 리흐테르의 CD 표지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들입니다.


실제의 리흐테르는 사진 찍는 것을 별로 안 좋아했다고 합니다. 이 부분에서 카라얀과 마찰이 심했다고요. 리흐테르의 생각으로는 연주가 완벽하지 않았는데 카라얀이 "자, 사진을 찍어야 하니 이쯤에서 그만합니다." 라고 하고 녹음을 마쳤다고 해요. 결국 재녹음은 없었죠. 왼쪽부터 카라얀, 리흐테르, 로스트로포비치, 오이스트라흐입니다. 이름만으로도 달의 무게를 넘어설 것 같은 스타링입니다. 전 이 사진으로 카라얀 얼굴을 처음 익혔는데, 아주 미남이었지 뭐예요. 배우를 해도 됐겠습니다.

[닫기]

by elvira01 | 2008/12/17 08:24 | 트랙백 | 덧글(0)

트랙백 주소 : http://highbrid.egloos.com/tb/4780163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