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ally retarded

방명록

이런 거 의외로 필요하더군요.;

by 정해민 | 2009/12/31 23:59 | 덧글(13)

무슨 말을.

낯두꺼운 자만 살 수 있는 세상이에요.

by 정해민 | 2009/05/24 04:11 | 트랙백 | 덧글(0)

090329 쓰릴미 / 090329 렌트 / 090330 자나, 돈트

스포일러가 될 것입니다.

1. 쓰릴미
- 090329 15:00
- 김우형 리처드, 정상윤 네이슨

쓰릴미는 워낙에 많은 평이 쏟아지는 텍스트고, 그 중에 몇 마디 더 덧붙일 게 없기 때문에 쓸까 말까 망설였는데, 잊기 전에 감상을 적어 놓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전 쓰릴미에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소극장, 좁은 무대, 배우 두 명, 게이 코드, 특정 층에서 수많은 중독자를 낚아 올림. 이 정도가 이 공연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의 끝이었고, 너무 빤하다고 생각했죠. 편견적이었지요. 심지어 리처드랑 네이슨 이름도 헷갈렸는걸요. 지금 와선 후회할 뿐이에요. 왜 07년도부터 달리지 않았는지. 이 공연이 이렇게 집착과 질투와 배신과 오기와 소유욕과 등등등으로 점철된 치정극인 줄 알았다면 저 또한 뮤지컬 시장을 키우고 제작사에 돈을 쏟아부은 수많은 사람 중의 한 명이 되었겠죠.
좋은 공연이고, 좋은 극장에, 좋은 배우들입니다. 아, 정상윤 배우. 놀랍더군요. 노래도 잘 하는데, 연기는 더 잘 하고. 같은 위치에 움직임 없이 서서 조명 하나로 34년을 늙어버리는 그 솜씨엔 그저 경탄을. 이 날 계약서를 쓸 때 칼이 빠지지 않는 사고가 있었는데요, 한참 칼을 갖고 꼼지락거리던 리처드가 "칼이 안 빠져." 라면서 씨익 웃었더니 "칼은 왜...?" 로 다시 관객의 집중력을 자연스럽게 극에 되돌리는 데선 경악을. 이런 게 가능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자기만 극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관객들을 같이 데려가더란 말이죠. 게다가 Life plus 99 years는, 아, 이 노래에 애정 고백을 담아 부르다니. 꿀꽈배기님의 표현을 빌자면 세레나데. 그게 딱인 표현. 다만 리처드 앞에서'만' 찌질한 네이슨을 보여주기 위해 팔랑팔랑 종이 인형 모션을 취하는 데 이게 눈에 거슬릴 때가 있어요. 김우형 씨도 만만찮게 좋았습니다. 제멋대로 어린아이인 리처드. 19세로 보였어요. Keep your deal with me와 Afraid가 특히 좋았습니다. 말 많았던 밧줄과 쇠막대기 모션은 자연스러웠는데, 삿대질이 너무 거센 게 신경쓰이더군요.
좋은 공연이었고, 잘 봤습니다. 왜 사람들이 반복 관람하는 지 충분히 설득되었고요. 저도 보고 나오자마자 다시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다만 가격과 할인이 슬플 뿐.


2. 렌트
- 090329 19:30
- 고명석 미미

신인 배우들이라지만, 렌트니까, 뭐 예의상, 막공인데 이번 시즌에 한 번 쯤은. 명석미미도 보고 싶었고. 이러면서 보러 간 공연이었습니다. 결과는 만족. 우연히 타임 세일 시간대에 인터파크에 들러 딱 좋은 위치를 잡은 것도 한 몫 했지요. 다른 자리에 앉았더라면 이만큼 좋진 않았을 거예요.
마음에 안 드는 점도 많긴 했어요. 일단 승현로저에 대실망. 인터미션 때 어떻게 저 배우가 로저냐며 일행과 성토했습니다. 일행은 저와 렌트에 대한 태도가 거의 일치하는 사람이었어요. 한국어 노래는 손발이 오글거려 잘 못 듣고, 들으면서도 머리 속에는 영어 가사로 재생되고, 그렇지만 렌트에는 반해 있고, 이 공연이 2000년대 말 한국에서 올라가기엔 시대 착오점이 많다는 데도 동의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공연이 호소하는 바에 빠져들고. 우리는 재림콜린에 반해 왔습니다. 듣던 대로 이게 데뷔라는 게 믿기지 않는 배우. 너그럽고 능글맞고 뻔뻔하고 강한 콜린 그 자체. 어디 숨어있다 오셨냐 했더니 학교에 계셨다는군요. 학생이었어요...! 전공은 성악, 렌트 오디션을 본 것도 우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단기간에 어떻게 이렇게 콜린에 동화되었는지. 심지어 Finale B 이후 커튼콜 격의 Seasons of love를 부를 때도 다른 배우들은 막공의 여운에 취해 있는데 콜린은 여전히 콜린이더군요. 이 배우의 음색과 이미지가 콜린에 잘 맞아 떨어져서 시너지 효과가 발생했을 수도 있겠으나, 최재림 씨가 커다란 다이아몬드 원석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사랑스러움의 극치인 지송앤젤과 함께하면 그야말로 완벽. 지송앤젤, 마음에 들었습니다. Today 4 U의 어려운 동작들도 신나게 잘 해내던데요. 작은 몸집에 귀엽고 오밀조밀한 얼굴 덕도 많이 보긴 했습니다.
명석미미는 기대 이하. 제 마음 속의 고명석 씨는 차지연 씨나 정선아 씨와 같은 레벨이었거든요. 차세대 배해선 혹은 차세대 김선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Out tonight이 그렇게 섹시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려주었네요. 본래 노래와 연기 중에선 연기 쪽에 손을 들어 주는 배우이긴 합니다만, 이 날은 목청이 덜 풀린 것 같았어요. 최혜진 씨의 모린은 처음 목소리가 나왔을 때 너무 앳되어 깜짝 놀랐습니다. 저게 모린? how can it be? 극이 진행되어가니 오히려 이런 모린도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Over the moon에선 17세 행위예술가워너비로밖에 안 보였지만, 원래 좀 같잖은 예술 하는 게 모린. 이것이 이 배우의 모린이라는 걸 넉넉히 알려주었습니다. 그냥 어린 아이예요. 나중에 88년생인 걸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황진이 OST에서 그대 보세요와 해어화를 부른 그 최혜진씨더군요. 노래 잘 하셔요. Over the moon이 모린의 첫 등장으로 중요한 임팩트를 담당한 넘버인데, 이 날은 막공이어서인지 관객들 호응도 좋았어요. 뮤지컬 매니아 층에서 앞쪽 관객을 점령한 것 같긴 했지요. 유달리 호응이 좋은 구역이 있었거든요. 거지석(Christmas bells 몇 번 째인지 모를; 리프라이즈에서 노숙자들이 관객에게 구걸합니다.)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음메~ 에서도 아주 적극적이었죠. 렌트는 관객 호응이 있을 수록 신나는 공연이기 때문에 함께 즐거웠습니다.
마크는 적역이었습니다. 처음엔 마크를 정말 싫어했는데, 보면 볼 수록 불쌍해요. 자신도 알고 있듯 언제나 한 발 바깥에서 내레이터 위치를 맡고 있죠. 로저와 룸메이트지만 사실 로저는 마크보다 콜린에게 애정이 깊은 것 같아 더 불쌍하구요. 콜린도 전화해서 바로 물어보는 게 로저냐 확인하는 거고, 나중에 콜린이 안 올 때 걱정해주는 건 마크인데 들어와서는 로저랑만 시시덕대고... (쓰다 보니 내가 외려 마크를 불쌍하게 만드는 것 같;) 둘 다 성공하지 못한 예술인 지망생이면서 왠지 모르게 로저가 마크를 더 무시하는 것 같고; 그래서 더 냉소적으로 변하는 캐릭터이지만 What you own 중 Alexy, I quit!이 이 날만큼 진실되게 전달된 적도 없었습니다. 누가 뭐래도 예술은 본인이 예술이라고 생각하면 예술인 거고, 전엔 자기가 쫓던 길에서 기어이 예술의 한 봉우리를 피워내겠다는 게 느껴졌지요. 특히 La vie Boheme이 신나더군요. 이 때 의상이 오리지널과 가장 비슷했기 때문일 지도 몰라요. 저와 일행은 공연 전부터 계속 왜 의상은 똑같이 안 가냐며 투덜거렸거든요. 이 불만이 극대화된 건 베니. 베니는 몇 번 말했듯이 제가 렌트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인데요, 무려 보라색의 새틴 셔츠, 단추는 세 개나 풀고ㅠㅠ 이건 웬 정찬우인가요ㅠㅠ 게다가 한국 공연의 베니는 더욱 비열해요. 아, 베니, 불쌍해!ㅠㅠㅠ 이래서야 까지 말라고도 못 하겠어! 조앤에는 조금 실망이었지만 어차피 렌트에서 조앤은 비중이 적죠. 그런 걸 감안해서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다는 느낌.
불평을 적자면 한도 끝도 없을 수 있어요.; 가장 대표적으로 번역이라든가, 여전히 스무스하지 못한 연출이라든가. 그런데 이 연출상의 구멍은 제가 워낙 렌트에 익숙해져서 이젠 뭐 거의 눈에 띄지도 않구요.; 신인들이 모여 만든 공연이기에 학예회스러운 분위기는 어떻게 해서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만, 그래도 즐거운 학예회였는걸요. 이 공연으로 렌트에 빠지게 된 사람은 얼마 없을 거라고 생각하긴 해요. 렌트가 본래 혼자서 7년 동안 만든 것이다 보니 헛점이 많기도 하고요. 그러나 이미 충분히 렌트를 사랑하는 저에겐 일정선 만족의 역치는 넘겨주는 공연이었고, 이 공연을 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미가 살아나고 앤젤이 다시 뛰어들어올 때부터 울면서 기립박수를 쳤습니다. 고마워요, 나의 렌트.


3. 자나, 돈트
- 090330 20:00
- 김호영 자나 막공

역시 호평이 쏟아졌던 김호영 씨의 자나, 역시 듣던 평 그대로. 딱 사랑스럽고 반짝거리는 공연이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리스와 하이스쿨뮤지컬의 게이 버전인 공연인지라, 여기에 또 어떻게 덧붙일 말이 없는데요. 이렇게 신나는 공연들은 어두운 분위기의 공연보다 리스크가 적다고 여겨지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필수적으로 채워야 하는 요소들은 있게 마련이지요. 그렇게 자주 올라가고 또 그다지 큰 연기력 가창력이 요구되지도 않는 그리스도 여러 번 욕을 먹잖아요. 모든 게 적당한 공연이었습니다. 세종M씨어터 사석 적고 좋은 극장이고요, 넘버들은 발랄하고 분위기를 노골적으로 전달해서 해석의 여지를 별로 주지 않지만 이런 넘버도 충분히 못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았고요, 정신 사납긴 했습니다만 그 덕분에 인터미션 없이 2시간 가는 데도 덜 지치게 되었고, 해피 엔딩으로 찝찝하지 않게 해 주는 서비스까지. 극장 근처에 살았더라면 이틀 걸러 한 번씩 보러 갔을 것 같아요. 놓치지 않고 보길 잘 했어요.

...막 내린 공연들 이제 와 평 쓰는 건 대체 무슨 심보.

by 정해민 | 2009/04/03 19:50 | 트랙백 | 덧글(2)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 6점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창실 옮김/동문선

책만 읽어도 멀미할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이 책에 대해 뭐라고 더 말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군요.

이런 류의 책을 쓰려면 자료가 엄청나게 필요할 테죠. 몇 페이지만 읽어도 이 사람이 얼마나 굴드에게 홀랑 빠졌는지, 얼마나 자료를 모았는지, 얼마나 집착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어요. 하지만 그게 미덕의 전부인가요? 그걸 조직적으로 구성하는 게 작가의 임무입니다. 그런 면에서 미셸 슈나이더는 작가의 의무를 등한시했다고 할 수 있겠어요.

작가는 확실한 글렌 굴드 빠입니다. 네 뭐 세상에 이런 사람 많고 많겠죠. 그 사람들의 노력이 빚어내는 색이 대충 어떻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요. 아니, 안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직접적으로 마주치기 전까진.

별점 몇 개를 써야 할 지 망설였습니다. 저한테는 정말 holy shit이었지만 꼭 서사적 구조가 있어야만 내용을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저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이 책을 좋게 읽을 수도 있을 거여요. 얇은 페이지수에 비해 정말 많은 정보가 담겨 있구요. 일종의 사료라고 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저에겐 그저 읽어내기 힘든 책이었을 뿐입니다.

...뭐라고 더 썼다가, 쓰는 저까지 더 기분이 나빠지길래. 이 쯤에서-_-;

by 정해민 | 2009/04/02 10:13 | 트랙백 | 덧글(0)

"Q&A" ★★★★★

Q & AQ & A - 10점
비카스 스와루프 지음, 강주헌 옮김/문학동네

우연히 만났어요. 다른 책에 대해서 리뷰를 찾아보다가 검색에 얻어걸렸지요. 처음 가 보는 블로그였고 그렇게 극찬한 포스트도 아니었는데, 왜인지 이 책을 읽어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아리송해요. 그 우연에 감사합니다.

인도를 배경으로, 퀴즈쇼에 대한 내용이라는 것만 알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40% 정도 읽고 양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했고, 한 장 넘길 때마다 책이 줄어가는 걸 아쉬워했어요. 마침내 다 읽고 책장을 덮었을 때는 이 책을 써준 작가에게, 이 책을 출판하기로 해 준 한국 출판사에게, 편집부 담당자에게, 번역자에게, 글을 읽을 수 있는 나에게, 온 세상에 감사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너무나 멋진 책이기 때문에 리뷰를 써야겠다 써야겠다 생각하면서도 충천하는 빠심을 가누기 힘들어 뭐라 써야 할 지도 모를 지경이었어요.

줄거리는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인도 빈민가 출신의 소년이 인도에서 새로 시작하는 대형 퀴즈쇼의 첫 승자가 되었어요. 상금이 크기 때문에 문제도 어려웠고, 제작진은 소년의 교육 환경으로 보아 그 문제들을 모조리 맞춘 건 비리나 짜맞춤이 있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상식이나 교양이라고는 몰랐거든요. 그래서, 소년은 우승하자마자 경찰서에 갇힙니다[...] 소년은 자기가 아는 문제만 나왔다고 주장하지만, 연속적으로 그렇게 운이 좋게 들어맞을 확률은 낮지요. 그리고 어떤 여변호사가 주인공을 변호하기 위해 한밤중에 경찰서로 달려와 빼내고, 주인공은 변호사의 집에서 어떻게 자신이 문제들을 맞출 수 있었나 얘기합니다.

놀라운 건, 그 모든 이야기가 하나도 억지스럽지 않다는 거예요. 소년의 주장은 사실이었어요. 일부러 퀴즈쇼용으로 공부하는 문제들이 아니라, 살면서 뇌리에 꽂히는 어느 한 순간, 그 순간의 집약이 우연히도 그 날 퀴즈쇼의 문제였다는 거죠. 헌데 그 우연의 연속이 모두 납득이 갑니다. 작가는 어쩜 이런 이야기들을 생각해냈을까요? 그리고 또 그걸 어떻게 이리도 자연스럽게 배열하고 풀어냈을까요? 그 구성력 하나만으로도 크게 점수를 줄 수 있는데, 더욱 놀라운 건 그 이야기가 재미있기까지 하다는 거예요.

불공평하고 괴로운 인도 밑바닥 계층의 이미지를 배신하지 않는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면서도 독자의 마음이 너무 아프지 않게, 그러나 현실을 충분히 들여다보며, 언제나 무력하고 약하고 당하는 입장이고 그걸 벗어날 길도 없지만 그 안에서도 삶을 계속하게 해 주는 반짝임, 유머, 배려, 아름다움을 충분히 살려주고 있어요. 따로 따로 떼어놓아도 단편 하나를 구성할 만한 기승전결을 갖고 있는 에피소드가 모여서 또 하나의 커다란 기승전결을 만들고 있어요. 숨이 막히게 몰아붙이는 속도감이 있는 건 아녜요. 만일 그렇다면 이 책이 그렇게 충만하다고 느끼지 못했을 겁니다. 적절한 속도로 페이지를 넘기게 하면서도 단순히 다음 내용을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야기 안에 푹 빠져 있기 때문에 그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 책을 읽도록 만듭니다. 게다가 부족함없는 마무리까지. 아, 이걸 뭐라고 설명할 수 있겠어요?

슬럼독 밀리어네어의 원작이더군요. 영화의 시간을 타고 신판이 나온 모양이에요. 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게 될 테니 기뻐요. 쉬운 표지이기 때문에 별점 평가를 선호하면서도, 늘 몇 점을 매겨 써야 할까 망설여져요. 이 책엔 단숨에 별 다섯 개를 그릴 수 있습니다. 연말 연시에는 온갖 어워즈가 발표되지요. 올해의... 가장... 이런 수식어가 붙은 하나를 꼽는 건 제게 너무 어려운 일이지만,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게 2008년은 Q&A를 만난 해라고.

http://highbrid.egloos.com2009-03-31T13:16:240.31010

by 정해민 | 2009/03/31 22:16 | 트랙백 | 덧글(0)

"리흐테르 - 회고담과 음악 수첩" ★★★★

리흐테르 - 회고담과 음악 수첩- 8점
브뤼노 몽생종 지음, 이세욱 옮김/정원출판사

브뤼노 몽생종은 유럽의 영화 제작자입니다. 20세기 주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몇 편 만들었지요. 저는 이 책으로 처음 만났습니다만.; 이 책은 본디 다큐멘터리 영화가 될 것이었으나, 여기엔 또 하나의 O.헨리적 이야기가 있습니다. 책의 앞 부분 내용 축약이 되는지라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분께는 책이 재미없어질 것 같아 가립니다.
예후디 메뉴인, 오이스트라흐 등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온 몽생종은 리흐테르의 다큐멘터리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몽생종은 계속 리흐테르에게 접촉을 시도했고, 말년에서야 리흐테르의 마음이 바뀌어 긍정적인 연락을 받았습니다. 리흐테르가 몽생종의 작업물을 본 거죠. 촬영을 좋아하지 않는 리흐테르에게서 간신히 녹음만을 허가받고, 작업을 진행하다가 몰래 카메라를 숨겨 촬영했지만 리흐테르는 금방 카메라를 인식하고 자신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몽생종에게 넌지시 알리면서도 별 제제를 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바로 카메라를 꺼낸 건 아니지만, 촬영은 순조로이 진행되었고, 둘은 리흐테르가 연주 여행을 다녀온 후에 작업을 마무리짓기로 합니다. 그리고 그 연락이 오고 1주일 후, 리흐테르는 죽었습니다.
[닫기]

이 이야기를 책의 앞에 배치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이런 류의 이야기에 못내 끌리는 저는 헉, 하고 육성으로 뱉은 뒤에 자세와 책을 고쳐잡았습니다. 몽생종은 영화로 만드는 것은 포기하지만, 자료를 묻을 수 없어 책으로 내기로 합니다. 녹음이 인터뷰라기보다 리흐테르의 자발적 잡담에 가까웠기 때문에, 리흐테르를 화자로 삼습니다.
시간적 순서에 따른 구성은 아닙니다. 주자의 어릴 적, 혹은 부모님과 조상에 대한 추적부터 시작해서 성장 과정을 묘사, 음악적으로 변화한 계기, 그리고 그의 음악 세계를 화려하게 묘사... 이런 건 없습니다. 말했듯이 이건 리흐테르 본인이 한 이야기이기 때문이지요. 그는 당연하게 계속해서 피아노를 쳐 왔고, 남의 눈으로 보았을 때 큰 전환점도 80세가 넘어서 회상하는 본인에게는 이 때는 이런 일이 있었지, 일 뿐입니다. 이 어조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읽기가 편해요.
앞 부분을 조금 읽다가 역자를 확인하니 이세욱입디다. 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이세욱이오. 베르베르 전문 역자인 줄로만 알았더니... 이런 책도 하는군요. 베르베르가 한국에서 성공했던 데는 그의 현학적인 문체가 이세욱을 통해 옮겨왔던 것도 한 몫 하지요. 베르베르의 문체랑만 잘 어울리는 줄 알았더니 리흐테르, 혹은 몽생종과도 궁합이 좋습니다. 이 책은 이세욱에게 큰 덕을 입고 있습니다. 리흐테르의 꾸밈 없고 덤덤한 성격이 잘 드러납니다.

리흐테르는 자신에게 일어나는 대다수의 일에 별 의사를 표하지 않고 따라왔습니다만, 몇몇 일에서는 언성을 높입니다. 미국에 다녀와야 했던 것과 러시아가 자신에게 가했던 압박 중 어떤 것 등이지요. 아주 심한 원칙주의자이지만, 그 원칙이란 게 몇 개 없어 세상과 많이 부딪히지 않고 살아온 사람으로 보입니다. 전체적으로 리흐테르는 순하고 완고한 할아버지의 이미지입니다. 두 단어가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여기서 만나는 리흐테르는 묘하게 어우러집니다.
리흐테르의 음악을 말로 거르라면 견고함, 깨끗함이란 단어가 떠오릅니다. 이 책은 리흐테르의 그러한 이미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약간 투박하기도 하지만, 정직하며 정확합니다. 평생 이렇다할 스캔들 하나도 없었던 그에게는 음악의 수도승이라는 별명이 있다고 합니다. 그 말에 어울리게도, 리흐테르는 음악에 관한 이야기밖에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전 이 사람이 여자도 꽤 좋아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음악이 너무너무 좋아서, 거기에 시간을 투자하다 보니 스캔들을 일으킬 기력도 없던 거라고요.) 리흐테르와 아주 잘 어울리는 뮤지션 중 하나인 카라얀과는 상당히 대조적이지요.

프로코피예프 사망 당시, 리흐테르는 러시아의 한 신문에 자신이 쓴 글을 게재했습니다. 그 책 역시 이 책에 실려 있습니다. 앞과 같은 어조에, 꽤 길고 재미난 글입니다. 저는 이 책에서 이 부분을 가장 좋아합니다. 여기서도 역시 리흐테르는 사람이 어떻다, 가 아니라 나는 이 사람과 이런이런 음악을 같이 했었다, 라고 밖에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그냥 음악 안에서 살았어요.

책이 상당히 두꺼운데, 반절 정도는 음악 수첩입니다. 이는 리흐테르가 다큐멘터리 작업에 도움이 되라고 녹음 당시 몽생종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리흐테르가 평생 동안 들어온 음악에 대해 짤막하게 코멘트가 되어 있지요. 너무 방대하고, 또 개인적이라 저는 조금 읽다가 덮고, 뒤의 인덱스에서 이름 몇 개만 찾아 보고, 그랬습니다. 몽생종이 편집할 때 너무 신랄한 것은 뺐다는데 그래도 너무 신랄합니다. 이 음악 수첩에 의하면 리흐테르는 마르타 아르헤리치를 아주 싫어했습니다. 특히 기돈 크레머와 연주할 때, 한 번도 맞춰 보지 않고 무대에 올라간다면서요. 그 외에 함께 잠깐 연주를 맞추어 본 글렌 굴드와 자클린느 뒤 프레에 대해 본문에서 좋게 언급한 것이 있습니다. 리흐테르가 글렌 굴드를 좋아한 것은 조금 의외였는데요, 둘이 너무나 다르지 않습니까. 가장 스타카토적인 연주를 하는 주자와 가장 정석적인 연주를 하는 주자. 극은 극에 끌린다는 오래된 말도 떠오르고, 그럴 만 할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렇습니다. 리흐테르는 굴드의 연주 뿐만 아니라 사람 자체를 꽤 마음에 들어한 것 같아요. 그가 치떨리게 싫어하는 미국에서 주로 연주한 사람이니 더이상 작업을 같이 할 기회는 없었겠지만. 리흐테르가 굴드를 만났을 때 더 젊었더라면 그와 작업을 더 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리흐테르는 아주 대범한 방식으로 세상을 거부하는 굴드를 조금 동경한 것 아닐까요. 자클린느 뒤 프레는 로스트로포비치에게서 배운 적이 있지요. 리흐테르가 자클린느를 만난 것도 이 때입니다. 당연히 좋아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리흐테르는 로스트로포비치도 상당히 좋아했어요. 연주만. 좋은 합주를 여럿 남겼지만 로스트로포비치의 출세, 명예 지향적인 성격에 힘들어했습니다. 이는 위에서 말했던 카라얀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셋이 연주를 함께한 적이 있었는데 리흐테르는 두 명의 적과 싸우느라 버거웠다고 해요. 그가 가장 마음에 들어한 피아니스트는 졸탄 코지슈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사람의 음반을 구입할 방법을 한 가지도 찾지 못했습니다...=_= 그 외엔 아르투어 루빈스타인, 아르투어 슈나벨, 에밀 길렐스의 연주를 좋게 언급했습니다. 넹 좋다고 말한 건 수도 없이 많는데 이들은 그 중에 저도 좋아하고 기억하는 이름일 뿐이예요.

잘 만든 책입니다. 번역도 좋고, 내용도 재미나게 구성되어 있고, 종이 질도 좋고. 이세욱은 이 기세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번역해주면 좋을 텐데요... 국일판은 국내 독자들에게 너무 가혹합니다. 브뤼노 몽생종의 태도도 좋습니다. 스비야토슬라프 리흐테르는 독일계 러시아인이라 이름이 이런데, 몽생종은 러시아판 서문에 이 책을 완성하는 데 필수적인 러시아판이 나와서 몹시 기쁘다고 말합니다. 한국판은 프랑스어판을 기본으로 삼고, 러시아판에만 있는 내용을 덧붙였습니다. 은근히 유머도 있어서, 이 책을 읽다 한밤중에 깔깔 웃은 적도 몇 번 있어요. 자기 전에 잠깐 읽으려 했다가 단숨에 다 읽어버렸습니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권하고 싶군요. 클래식을 좋아하건 아니건, 피아노를 특출나게 좋아하건 아니건(피아노에 대해 애정이 대단한 피아니스트의 자서전인데, 싫어하는 사람은 읽으면 안 되겠죠), 리흐테르라는 이름을 한 번이라도 들어 본 사람이라면 무조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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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흐테르는 "리흐테르? 라흐마니노프한테나 어울리는 연주자죠."라는 평도 들어 보았다고 합니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아주 좋아하는 노래인데, 꽤 좋은 평을 받고 있음에도 저는 이 곡의 리흐테르 버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 이 곡은 클라이번의 연주가 저의 엄마 오리이고 생필품이기 때문에 이것 하나 외에는 다른 걸 거의 받아들일 수조차 없지만요... 리흐테르의 연주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로스트로포비치와 함께 연주한 베토벤 몇 곡입니다. 피아노 혼자나 피아노 교향곡이 아니라요. 피아노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악기이고, 첼로는 그 다음으로 좋아하는 악기입니다. 한참 피아노를 듣다가 첼로도 듣고 싶어진다, 할 때 저는 이 연주를 듣습니다. 그리고 이걸로 충분한다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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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님, 이 글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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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링으로 얻은 리흐테르 사진을 몇 장 올립니다. 얼굴만 봤을 때는 에잉 그냥 커다란 할아버지네, 싶겠지만 책을 읽고 얼굴을 보니 참으로 귀여워 보입니다. 저 얼굴 저 덩치로 피아노 앞에 꼿꼿이 앉아 있었단 말이죠, 그것 참.



이 두 가지는 제가 본 리흐테르의 CD 표지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들입니다.


실제의 리흐테르는 사진 찍는 것을 별로 안 좋아했다고 합니다. 이 부분에서 카라얀과 마찰이 심했다고요. 리흐테르의 생각으로는 연주가 완벽하지 않았는데 카라얀이 "자, 사진을 찍어야 하니 이쯤에서 그만합니다." 라고 하고 녹음을 마쳤다고 해요. 결국 재녹음은 없었죠. 왼쪽부터 카라얀, 리흐테르, 로스트로포비치, 오이스트라흐입니다. 이름만으로도 달의 무게를 넘어설 것 같은 스타링입니다. 전 이 사진으로 카라얀 얼굴을 처음 익혔는데, 아주 미남이었지 뭐예요. 배우를 해도 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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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vira01 | 2008/12/17 08:24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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